03 무궁화로 꽃피워낸 남궁억의 신앙과 독립운동 < 홍천 한서교회>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의 깊은 산골 홍천군 서면, 그곳에는 보리울이라는 이름의 그림 같은 산골마을이 있다. 빼어난 풍광에 이끌리어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문득 양지바른 언덕 모퉁이로 단정하게 앉은 교회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193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한 이 교회는 해방 후, 교인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최근에는 옛 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념관과 함께 새롭게 탄생했다. 바로 한서교회다.
이 교회의 역사는 1918년 바로 이 지역 출신인 남궁억의 귀향으로부터 시작됐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근대식 교육을 받은 남궁억은 고종의 개인 통역관이 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한반도 강탈의 위협 속에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워지자 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횡성신문>을 창간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야욕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 음모를 몇 차례에 걸쳐 폭로하여 일제게 체포, 구금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간 즈음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민족의 비극과 시대의 암울함은 그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었고 일제의 한일합병이 강행된 1910년 서울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뒤 배화 학당 등에서 민족교육에 헌신하다가, 돌연 고향으로 낙향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일제의 감시가 뜸한 고향의 깊은 산골 마을에 모곡교회(지금의 한서교회)와 모곡서당(보리울학교)을 세우고 본격적인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을 시작했다. 3년 후에는 6년제 근대식 교육기관인 모곡학교를 세워 애국신앙청년을 배출하는데 헌신했다.
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도 계속되었다. 일찍이 근대식 교육을 받은 그였으나 누구보다 한국사에 조예가 깊었던 <동사략>, <조선니약이>(조선이야기)와 같은 책을 써서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한편, 우리말로 된 약 100여 곡의 애국가요와 찬송가를 지어 사람들에게 보급함으로서 신앙교육과 함께 한글보급에 힘썼다. 그 중의 한 곡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 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 갈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그런데 그 즈음, 일제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한반도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국화는 배꽃이었다. 그러나 신라시대부터 고려까지 천 여 년 간 우리 민족과 한반도를 대표하는 꽃은 무궁화였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 <고금기> 등의 기록 뿐 아니라 당나라의 역사서에도 ‘군자의 나라는 무궁화의 나라’로 기록이 등장한다. 한마디로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일제의 벚꽃보급은 한마디로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남궁억은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전국적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시작했다. ‘벚꽃처럼 일제는 활짝 피었다가 사라질 것이요, 조선인은 봄부터 가을까지 꽃 봉우리를 피우는 무궁화처럼 강인하게 살아남아 역사를 영원히 이어갈 것이라는 뜻을 담아 전해지기 시작한 무궁화묘목은 무서운 속도로 전국에 퍼졌고, 이 시기 전국의 학교와 교회의 무궁화는 거의 그의 손을 거쳐 공급됐다.
그럼에도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민족앞에 헌신하는 그에게 큰 감동을 받은 홍천군 모곡리 사람들은 마침내 1933년 신앙을 기본으로 한 민족독립운동단체인 십자가당을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제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학교 건물은 폐쇄되고 약 7만 여주의 무궁화 묘목은 재로 변했다. 남궁억도 십자가당 10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다행히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교회는 일제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39년, 남궁억도 세상을 떠나면서 한서 교회의 역사도 잊혀져갔다.
현재 복원된 한서교회는 옛 모곡교회와 모곡학교 터에 세워졌다. 교회와 함께 옛 모곡학교 건물과 60여 종의 무궁화 2000여 그루로 조성된 무궁화동산, 한서 남궁억기념관도 함께 등장했다. 기념관 안에는 십자가당 사건 취조 장면, 보리울 모곡학교의 모형을 비롯해서 남 궁억의 붓글씨와 다양한 집필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짧은 기도문은 이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동지들을 만주로,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 드렸는지를 말해준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이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