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의 아버지, 쯔빙글리와 마주 서다
취리히 프라우민스터교회에서
한국기독교 성지를 돌아보는 순례의 길에 서서 보면, 130년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수많은 서구 교회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언젠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한 성지순례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그 여행은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중에, 마침내 지난 11월, 그 기회가 왔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캐나다, 호주의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흐름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미국으로 대서양을 건너간 초기 미국 기독교 역사에서 시작되고 그 흐름은 또 다시 타락한 유럽 가톨릭 교회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교회가 정해준 말씀이 아닌 성경속 말씀’에 따라 신앙의 양심을 따라가도록 만든 종교개혁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단순히 마틴 루터와 독일교회의 종교개혁에서 멈춰있는 우리의 사고를 한 발짝 더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소중한 역사가 있다. 이스라엘, 요르단, 독일과 프랑스에서 멈추곤 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생애 한번은 반드시 닿아야 하는 개혁교회의 성지, 그곳이 바로 스위스 취리히다.
스위스의 상징, 시계와 교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알았던 그 시절, 스위스 사람들은 교회의 시계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주일이면 예배 시간에 늦지 않게 교회로 달려간다. 스위스 교회의 시계 소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는 소리였다. 하나님께서 스위스의 시계 산업을 축복하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한 취리히는 스위스 구글, 디즈니 리서치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의 유럽본부가 위치한 경제중심지이자, 페스탈로치의 탄생지이고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스위스 연방공과대학(ETH)이 있는 교육 중심지이다. 또한 유럽 최대 예술대학인 취리히예술대학(ZHDK)과 함께 다다이즘, 프라이탁 가방과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헤르베티카 서체가 탄생한 곳으로 어디서나 예술적 분위기가 넘친다.
하지만, 취리히 중심가의 린덴호프lindenhof 언덕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이 바로 개혁교회들이다. 정중앙을 관통한 리마트강을 중심으로 프라우민스터 성당, 그로스민스터 교회와 성 피터교회 등 개혁교회의 높은 첨탑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리마트 강 서쪽 둑에 위치한 녹색 첨탑의 프라우민스터 교회 Fraumünster church는 취리히의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과 아우구스토 자코메티augusto giacometti가 제작한 유리창과, 그리고 5,793개의 파이프가 있는 거대한 오르간을 보기 위해 일년 내내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전통 교회가 이렇게 높은 첨탑과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에 집착한 이유가 있다. 중세 유럽의 교회 건축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형상화 하는 작업이었다. 높은 첨탑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지막한 예배당 건물은 성도들의 겸손함을 포현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창문을 통해 교회 안을 가득 채우는 눈부신 빛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변함없는 사랑의 빛을 상징한다. 그래서 교회의 창문의 디자인과 설치는 교회 전체의 건축만큼이나 중요했고 그래서 수많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교회 창문 디자인에 자신의 명예를 걸곤 했다.
프라우민스터 교회는 원래 신심이 깊은 귀족 부인들이 주로 모여 예배와 기도를 드리곤 하던 여수도원이었다가 후에 쯔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16세기 취리히의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던 교회로 변신했다.
프라우민스터 교회를 내려다 본 린덴호프 언덕 가까이에, 취리히최초의 개혁교회 성 피터 교회가 있다. 작은 교회 건물치고는 유난히 큰 시계가 걸려있다 싶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라고 한다.
16세기 개혁교회의 특징은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예배에서 온 회중이 중심이 되어 드리는 예배다. 이전의 예배가 성직자들이 라틴어로 예배를 주도하고 구별된 성가대만이 찬양을 하고, 회중은 그저 바라보는 예배였다면, 개혁교회에서는 모든 회중이 자기의 모국어로 함께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하며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라틴어를 배운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가능해졌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예배의 장소도 교회에서 가정으로 확장됐다. 실제로 당시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가정예배 매뉴얼’도 작성해서 보급했다.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시각으로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놀라운 변화의 중심에 쯔빙글리가 있었다.
종군사제 쯔빙글리의 인생질문,
‘교회와 복음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미트 강을 사이에 두고 프라우민스터 교회와 나란히 선 두 개의 높은 첨탑이 보이는 교회가 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개혁교회를 싹틔우고 178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쯔빙글리 종교개혁의 심장, 그로스민스터 교회다.
두 개의 첨탑으로 상징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교회는 1100년부터 건축을 시작해 오늘날까지도 수없이 많은 중건을 거듭해오고 있다. 독특한 신고딕 양식의 탑과 지하에 남아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둥근 지하묘지, 그리고 회랑에 남아 있는 자코메티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서린 세월의 흔적은 대표적인 가톨릭교회로 출발해, 세계 개혁교회의 심장부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역사를 안고 900년의 세월을 굳건히 서 있다.
무엇보다 이 교회 안에 발을 딛는 순간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오토 뭉크 Otto Münch가 제작한 묵직한 청동 문으로, 일명 쯔빙글리문이라고 불린다. 거기엔 그의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 24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16세기 취리히 사람들의 삶과 당시의 교회 현황, 그리고 그 가운데 있었던 쯔빙글리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교회 개혁과 순교의 순간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못 감동을 자아낸다.
교회개혁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가장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됐다. 쯔빙글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1484년 스위스 발트하우스의 한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쯔빙글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을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아버지와 사제인 삼촌으로부터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10살 때 이미 라틴어 문법과 음악, 변증법을 배우고, 14살에 베른 대학에, 16살에 빈 대학에 입학해서 인문학과 라틴어를 전공한 뒤, 18살부터 바젤 성 마르티누스 학당에서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영재였다. 22살이 되던 1506년, 인문학 석사가 된 그는 부모님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인 배경은 사회에 관심이 많은 인문학도로 사제가 된 이후에도 많은 인문주의자들의 모임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한마디로 스위스 종교계와 문화예술계의 핫 아이콘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당시 스위스는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이 경제,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경제가 어려워지고 농사지을 땅이 없는 가난한 집안의 젊은이들은 이웃나라의 용병으로 나가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야 했다.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사제 쯔빙글리는 그들과 함께 종군 사제로 참전해서 절박한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하지만 도무지 복음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가 쌓은 명문학교에서의 인문학적 지식과, 거룩한 사제 생활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던 교회중심의 교리는 그들의 삶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쯔빙글리 자신이 누리는 안정된 삶이, 그 젊은이들이 목숨 걸고 번 돈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 단 한 순간도 의심해본 적 없는 복음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다.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용병으로 팔아넘기는 권력층과 그들 뒤에 숨어 있는 교회의 부도덕적인 현실을 직시한 그는 ‘교회와 복음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여! 교회로 돌아가라!
그런 고민을 안은 채 그는 34살이 되던 1518년, 취리히의 대표적인 교회였던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역사적인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그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단 한 가지, 강해식 설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의 상당부분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태복음을 한절씩 차례로 강해하며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전했다.
그리고 그는 합법적인 과부 안나와 결혼하고, 성경에서 명하지 않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며 교회안의 모든 형상과 십자가, 그리고 오르간까지 치워버렸다. 그리고 1523년 마침내 가톨릭교회를 향해 67개 조항에 이르는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개혁전쟁은 2년간 치열한 논쟁과 결정 그리고 다시 결정을 번복하는 과정을 거쳐, 미사가 폐지되고 개혁파 형식에 따른 복음 설파와 성만찬이 공인되었다.
하지만, 이에 끝내 불복하지 못한 일부 교황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취리히를 공격했고 쯔빙글리는 47세의 나이로 그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가 죽은 뒤 적들은 그와 그의 가족들의 시체를 사지 절단하여 효수함으로써 개혁교회들을 위협했으나 쯔빙글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심어놓은 개혁 교회의 전통과 견고한 복음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고, 신학자 불링거와 신학자이면서 경제학자였던 아니아르투어 리히에게 이어져 혁명적인 사회개혁의 열매를 낳았다.
라미트 강가의 건물 옆에 선 쯔빙글리의 동상. 그가 이 시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이곳에서 단순한 종교지도자의 이름이 아닌, 정신 그 자체다. 복음 속 진리를 열렬히 추구하고, 그 깨달은 바를 용기 있게 목회와 삶에 적용하는 한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개혁하고, 사람들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약탈하는 세상적 힘을 어떻게 제압하여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지,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떻게 사회개혁이라는 큰 열매를 낳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쯔빙글리의 삶. 취리히의 오늘은 400년 전 쯔빙글리라는 사람의 삶이 밀알이 되어 싹틔운 시냇가의 나무와 같은 곳이다.
글 이 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 선교회 대표
사진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제공 (www.koreanbibleroa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