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랜디스와 내동교회
랜디스밸리에서 제물포까지
우리에게는 아미시 마을로 잘 알려진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 랭카스터 지역에 1700년대 초, 스위스 개혁교도의 한 지파인 메노나이트 공동체가 이주해왔다. 그 공동체의 창시자 중의 하나가 제이콥 랜디스인데, 그는 취리히 출신의 개척농민으로 1720년 즈음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펜실베니아 동부 램페터라 불리는 지역에 도착했다.
전통적인 농부출신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에 필요한 목공이나 철공을 하면서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들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발달된 농법으로 토지를 관리하고 곡식을 재배함으로서 랭카스터는 ‘미국의 곳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곡물 생산량이 많은 곳으로 발돋움했다. 그들의 중심에 제이콥 랜디스와 독일계 메노나이트 개혁교도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지와 헨리 랜디스George Landis와 헨리 랜디스 Henry Landis는 이 땅에 정착한 할아버지 세대의 유물을 모아 1700년대 독일 농촌문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농장 한 켠에 ‘랜디스밸리 박물관’을 열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찾아와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양을 치며 경건한 예배로 하루를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명소가 됐다.
취리히 출신의 보수적인 메노나이트(재세레파)였던 제이콥과 그의 지인들은, 그는 기존의 모든 교회질서를 부인하는 급진적 재세례파와 캐톨릭, 그리고 개혁교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의 와중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목숨 건 항해를 통해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때문에 정치 사회적으로 화려한 직업을 갖는 대신, 대대로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고 경건한 개혁교도로서의 삶을 사는 전통을 지켜왔다.
그래서 랜디스 가문의 후손인 피터 랜디스 Peter Johns Landis, 1833-1899와 그의 아내 마르타 바 Martha Barr, 1830-1911의 다섯 자녀도 대부분 농부가 되거나 농부에게 시집을 가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다섯째로 태어난 엘리 만큼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달리 영특하고 인정이 많았던 아들은 결국 16살에 국립학교에 들어가 의예과를 졸업한 뒤 18살에 명문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5년 뒤 의학박사가 되어 랭카스타 시립병원의 레지던트가 되었다.
마침 미국의 신실한 젊은이들 사이에는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 즈음 미국성공회의 성클레멘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엘리도 뜨거운 선교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성공회 지도자들은 그에게 5년간의 한국 선교를 제안했고 그는 서슴지 않고 이를 수락했다.
그렇게 그는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1890년 8월 26일에 캐나다에서 출발한 배는 9월 23일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이후 부산항을 거쳐 인천에 도착한 것이 9월 29일, 마침 성 미카엘 기념축일이었다. 실력 있는 젊은 의사, 그리고 신실했던 스위스 개혁교도의 후손인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는 그렇게 25살에 한국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내동 언덕의 청년 의사,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열다.
인천시 내동의 언덕위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건물, 바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내동교회다. 처음 코프주교와 엘리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한 날이 마침 성미카엘 축일이었기 때문에 설립당시 교회 이름도 성 미카엘 교회다.
랜디스도 작은 시약소를 열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랜디스의 병원에는 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환자가 찾아오기 시작해서 매일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어났다. 서울에서 약을 구해오기 전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성분이 있는 약재를 구해 치료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값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달걀이나 과일을 대신 주고 갔다. 단아한 체구에 따뜻한 미소, 자상하면서도 세심한 진료 태도로 진료를 하는 그 존재는 이내 가난한 환자들을 몰려오게 했다.
그리고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두뇌도 비상한데다가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이내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 중에 가장 우리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낯을 가리는 여성 환자들도 찾아오기 시작했고, 점차 학문적 커리어가 알려지면서 외국인들에게 높은 신뢰를 받는 의사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환자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주교와 영사관은 병원 건축을 추진했다. 서양식 건물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지어지는 과정이 신기했던지 랜디스는 자세히 그 과정을 기록하기도 했다.
‘…병원에선 한국인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건물의 벽은 쪼갠 대나무로 엮고 진흙을 바른 뒤 그 사이에 8피트 높이의 수직 기둥들을 나무로 연결한다. 이것이 마르면 다시 모래를 섞은 흙으로 벽을 바른다. 그 바깥쪽에는 접착력이 높이기 위해 해초를 넣어 끓인 물에 섞은 석회를 다시 바른다….한국인들은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방바닥 밑에 돌과 진흙으로 만든 온돌을 만들고 불기운이 통과하게 해서 난방을 한다. 그래서 바닥에 돚자리를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펴고 잔다. 문과 창문에는 유리 대신 종이를 바르는데 한국의 종이가 튼튼할 뿐 아니라 반투명하기 때문에 보온도 되고 볕도 통과시켜 유리를 대체하기에 아주 좋다….’
그렇게 인천지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성누가병원이 문을 열었다. 마침 성누가 축일에 완성이 되었기에 이름이 이렇게 됐지만, 랜디스는 그 이름이 조선인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과 조선인의 정서을 담은 이름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낙선시의원 樂善施醫院’ 영어로는 ‘The Hospital of Joy in Good Deeds’라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며 실력있는 의사인 랜디스를 ‘약대인’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병원이 있었던 이 언덕은 지금도 약대인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조선을, 특별히 그가 살았던 인천을 사랑했다. 그는 곧잘 병원 아래로 보이는 조선인 마을을 내려다보며 그들을 향한 사랑이 날마다 더욱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시적인 진료나 성공회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일 말고는 인천을 떠난 적이 없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부어 오늘을 살았다. 그렇게 그는 인천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자’같은 존재로 살았다. 그런 랜디스를 지켜보던 지인들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랜디스 박사는 한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잘할 뿐 아니라 한자도 잘 이해하는 학자다. 그는 제물포에 있는 모든 계층의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 그의 병원에는 매일 환자들로 붐빈다. 하지만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에 치료비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랜디스 박사는 제물포에서 발생한 심각한 전염병과 위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다….’
병원이 생긴 뒤에는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인근의 서울 충청도는 물론 멀리 제주도에서도 환자들이 몰려왔다. Malcolm이나 Laws 같은 의사들도 협력했고, 또 수녀간호사들도 있었지만, 그 인원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상황이었다. 그는 진찰은 물론 왕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나 과로를 하는 것이 주교들의 걱정을 살 정도였다. 그러나 ‘환자 진료’는 그가 ‘낮에’ 하는 일과일 뿐이었다.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와 고아원을 열다
저녁이면 그는 일본인, 중국인들의 요청을 받아 영어를 가르쳤다. 특히 그는 영향력 있는 일본인들에게 영어성경으로 복음을 전하며 이들이 한국에 대한 불법적인 강점에 대한 양심적인 일본인의 역할을 해주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조선인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자 했지만 영어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영어학교의 기틀을 잡아 다른 선교사에게 넘긴 뒤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인천에 온 지 2년째가 되던 해, 그가 치료하던 여인이 숨을 거두며 남겨진 어린 아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랜디스는 코프 주교와 그 일을 상의한 결과 그 아이를 양자로 키우는 동시에 다른 고아들도 함께 데려다 키우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5명의 고아들을 키웠다. 랜디스는 환자를 돌보는 것 이상으로 이 어린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이를 지켜본 코프 주교는 1893년에 병원 건너편에 새로 지은 집을 얻어 아이들과 함께 살며 교육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이때부터 3년간 랜디스는 더 많은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재우며 교육도 병행했다. 낮에는 하루에 수백 명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이 아이들을 훈육했다. 단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돌볼 틈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인천에 정착한 지 5년 만에 그는 안식년을 얻어 잠시 미국의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1896년 성탄절에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약 5개월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과 그 아이들과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 기간에 그가 선교단에 보낸 편지에는 그런 그의 순수한 열망이 절절이 묻어난다. ‘외국인이 모여 사는 조계지를 떠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마을로 돌아가 아이들이 한국인 전통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집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자신의 생을 바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인천으로 돌아왔을 대는 마침 성누가병원 증축 준비도 다 끝난 상태였다. 엘리 랜디스는 이제야말로 그가 인천에 와서 하고 싶은 일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렇게 선교단의 지원을 통해 아이들의 거처가 마련됐고 랜디스는 아이들과 함께 송림동에 마련된 보금자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해 연 말까지 랜디스는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양자로 키운 그 여인의 아들에게 바나바라는 세례명을 주고, 결혼까지 시켰다. 함께 키우고 있던 예닐곱 명의 고아들을 위한 작은 학교도 운영했다. 아이들은 특히 랜디스에게 기초적인 의료 도우미 훈련을 받아 ‘어린 의사 the little doctor’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랜디스가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그저 감기 기운이겠거니 생각하고 일에 몰두하며 진통제로 며칠을 버티는 사이 증상은 급격히 악화됐다. 급히 외국인 조계지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온갖 방법을 다 취했지만 결국 그는 3주후인 4월 16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헤아려 한복에 두루마리를 곱게 입혀서 그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잊혀진 성자, 엘리 랜디스를 기리며
불꽃같은 8년간의 헌신, 그는 그 기간 동안 젊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많은 흔적을 남겼다.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종합병원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인천 최초의 영어학교와 고아원을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한국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24편이나 되는 조사자료와 논물을 미국의 영문 잡지에 기고했다. 그 자료는 서구 사회는 물론 우리나라에서 한국학자들에게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선교사이면서 그는 한국학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현재 연세대학교에 기증되어 ‘랜디스 문고’로 보관되어 있다.
그의 가문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농부가 되었다. 편리한 세상의 문명을 멀리하면서 검소하고 경건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오직 그만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따라 의사가 되었고, 타고난 영민함과 성실함으로 성취한 탁월한 의술과 자신에게 허락된 생명 전체를, 강대국의 폭압적인 약탈 아래 놓인 조선인을 위해 바쳤다, 가난하고 병든 조선인 수만 명을 살리고, 버려진 아이들의 곁을 지키다가 한 줌의 흙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1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 지난 2017년, 인천시가 외국인 묘지를 인천가족공원 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유물이 발견됐다. 바로 랜디스 박사가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던 십자가였다. 켈틱 교회 전통 문양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뒷면에는 ‘자비’ 한마디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유일한 유품, 그러나 그 십자가는 그가 생명을 바쳐 세운 교회와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시립 박물관 수장고의 어둠 속에 다시 묻혔다.
다행히 내동교회 뜰 한켠에 몇 년 전 조성된 코프 주교와 랜디스 박사의 기념 동상이 있다. ‘정신 나간 짓’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국선교를 강행한 코프 주교, 그 주교가 감동해서 자신의 생활비마저 떼어주고 싶을 만큼 열정적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의술로 감동시켰던 젊은 의사 랜디스. 그 두 사람은 한국에 최초의 영국성공회(현재는 대한성공회) 교회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 교회가 초기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동상 속 얼굴이 삼십대 초반의 젊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겨우 삼심대 초반의 나이였음에도 진료에 고아원 운영에 너무도 자신을 혹사한 나머지, 마흔이 훨씬 넘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 일화를 생각하노라면, 그의 체취가 배어 있는 내동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겨우 올라 교회 뜰에 있는 그 동상에 이르러도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질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심장에 어떤 사랑을 심었기에 그 어린 나이에 ‘선교 적대 국가’로 알려졌던 조선에 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 땅을 그렇게도 뜨겁게 사랑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었을까. 그의 심장에 있던 사랑과 지금 내 가슴에 있는 사랑은 왜 이렇게도 다른 것일까.
부끄럽고 미안하고 너무도 고마워서, 한 번 닿으면,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는 곳, 이곳은 대한성공회 내동교회의 뜰 안, 랜디스 박사 동상 앞이다.
이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선교회 대표
사진제공/대한성공회내동교회,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