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기독교 성지 종주 두 번째 일정은 제주시 아라 동에 위치한 성안교회에서 시작됐다. 성안교회는 현재 제주도 전체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로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세운 성내교회에서 출발됐다.
1907년 마펫선교사에 의해서 시작된 평양신학대는 마침내 한국 장로교 사상 최초의 목사 7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한 사람인 이 기풍 목사는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로 향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는, 고립된 섬 지방이 흔히 그렇듯, 온갖 민속신앙이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우상의 제국이었다. 제주도사람들은 제주도에 18,000의 신이 살고 있다고 믿으며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온갖 종류의 신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었다. 얼마나 그 우상의 힘이 강한지,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나에도 신이 노할까 두려워 ‘신구간’이라고 불리는 기간에만 이사를 할 정도다.
그런 제주도 사람들에게,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우상숭배의 땅이었던, 100여 년 전에, ‘18,000명의 신은 가짜 신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짜 신’이라고 주장하는 외래 종교를 전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설상가상 1901년에, 천주교와 토착주민간의 마찰로 인해 벌어진 ‘이재수의 난’ 때문에 서양 종교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에 간 이기풍 목사는 철저하게 주민들에게 배척을 당했다. 이기풍 목사도 기개가 보통이 아니라서 말이라도 통했으면 좀 쉬웠을텐데, 제주도 특유의 방언에 막혀 물 한 모금 얻어먹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마을에는 내려가지도 못하고 한라산 주변만 맴돌다가 기진하여 쓰러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