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선교사 휴양지에서
5월 11일, 지리산은 아직 눈부신 연두빛 신록의 바다였다. 전망대 난간에 서서 그림 같은 능선을 내려다보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노라니, 가슴 속 묵은 생각의 찌꺼기들이 다 씻겨나가는 듯하다. 내려다보니 멀리 구례 시내가 한 눈에 펼쳐진다. 그 뒤로는 힘찬 백두대간의 마지막 용트림이 능선들을 따라 흘러내려간 그 곳엔 드넓은 대지 남도 땅이 펼쳐진다. 일행은 바람에 잠시 땀을 식힌 뒤 노고단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반도의 곳간인 남도 땅은 한국 기독교 복음화의 본부였다. 유진벨과 린튼, 포사이든과 오웬 등 한국 기독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던 땅. 이들의 선교활동은 그야말로 멈출 줄 모르는 엔진과도 같았다.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전라남도 내륙은 물론 해안과 도서지방까지 복음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그들은 복음만 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굶주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과 최신의 현대 의술 그리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현대적인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들고 와 ‘버림받은 이’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복음으로 정신과 영혼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골목마다 기도방이 세워졌고 마을마다 교회가 들어섰다. 1940년대 초, 일제의 강제 추방에 따라 한반도에서 철수하기까지 약 반세기동안 이들이 전라남도에서 펼친 헌신적인 복음 사역은 한반도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당시 조선은 백성들을 위한 적절한 응급의료시설이나 방역시스템이 없었다. 그 때문에 전염병이 한 번 돌면 마을이 전멸하는 예가 허다했다. 그 와중에 그들을 치료하던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희생됐다. 하루에만 수 백 명이나 되는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정작 자신은 과로에 쓰러지거나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쳐 병으로 객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어린 자녀들이 풍토병에 목숨을 잃는 일이었다. 당시 희생자의 절반이 어린 자녀들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남장로교는 ‘선교사 전원철수’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 때 목포 선교부를 이끌며 전라남도 선교 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유진 벨은 ‘일시 후퇴’라는 전략을 제시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여름동안은 휴양지로 피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사역지로 복귀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본국 후원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선총독부와 영구임대계약을 맺고 이곳 노고단 일대에 선교사 휴양지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920년 노고단에 교회와 숙소 등 50여 채의 휴양시설이 들어섰다. 그 때부터 매년 여름이면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선교 전략을 재정비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경 한글번역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들이 시작되어 1936년 역사적인 ‘성경 한글번역’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위협하는 풍토병을 피해 온 피난지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현장으로 변해갔다.
전망대에서 성삼제 주차장까지는 가파르고 좁은 차도라 도보로 오르기엔 다소 위험하지만 주차장에서 노고단 산장까지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도보로 약 1 시간 남짓한 거리. 중간에 돌계단이 놓인 가파른 지름길로 가면 20여 분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산장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았다. 다행히 친절한 산장관리인을 만나 ‘잠시 돌아보고 내려온다’는 조건으로 휴양지 터에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올라간 옛 선교사 휴양지. 그런데 그곳에는 교회 터로 보이는 오래된 석조 건물의 골조만이 남아 쓸쓸히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총독부와 선교사들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 정치 사회적 안목이 뛰어난 독립 운동가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일본총독부는 선교사들을 추방 조치시켰고 이에 따라 이곳 노고단 선교사 휴양지도 폐쇄됐다. 그 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50여 채에 이르던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이곳조차도 지방자치제 그리고 불교계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방문을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마치 당시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방만한 생활을 했다는 인상을 주는 내용의 글을 넣은 책이 전국에 배포되는 사건까지 일어나 강력하게 항의를 하는 등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선교사 휴양지 터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산책로에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2.30미터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숲이 우거져 있어 밖에서는 전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산장관리인이나 이전에 와본 적이 있는 이의 안내를 받지 않고서는 현장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나마도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어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다. 짧은 유적 설명이 있다 한들 출입금지인 유적에 누가 관심을 쏟을까.
백여 년 전, 이 곳에 있었던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심정으로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그들이 저 아래 마을에서 어떤 고통과 희생을 치르고 올라왔으며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어떤 아름다운 일을 베풀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알려하지도 않는 이들에 의해, 이 곳에 심어진 고결한 꿈과 기도와 찬양, 그리고 목숨만큼이나 무거운 땀 흘림의 체취가 지워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역사와 이곳에 있었던 이들의 ‘조선의 영혼을 향한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 얼마나 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무서운 풍토병으로 동료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죽어나가던 그 때, 본국에서조차 그만 돌아오라고 권했었던 그 때, 힘 있는 자들의 수탈 대상으로 전락한 이름 없는 조선의 백성들, 일제의 총칼 아래 짐승처럼 버려져 있던 조선의 백성들을 두고 돌아갈 수 없었던 선교사들이 ‘조선 복음화에 목숨을 바치기 위해’ 내렸던 거룩한 ‘일보후퇴’의 현장, 한글성경번역으로 일제의 문화 탄압 속에 사라져가고 있던 우리 한글이 다시 태어난 현장, 노고단 선교사 휴양소.
이곳이 이웃들과의 평화 속에 아름답게 지켜지고, 믿는 자나 믿음이 없는 자나 다 이곳을 찾아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실천한 예수님의 사랑을 칭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의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 심겨진 꿈과 고결한 희생의 유산을 배우고 이어가는 그 날을 볼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돌아보심만이, 신실한 순례자들이 이곳을 마음 놓고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기에, 오직 이 곳을 생각하는 믿는 자들의 심령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에 관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심령이 되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돌아보시고 도우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글 이 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 선교회 대표
사진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제공 (www.koreanbibleroa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