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리로 교회를 옮긴 뒤 진성구 장로와 일부 성도들은 놀라운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고 이들의 믿음은 불붙듯 뜨거워져 갔다. 나옥매 전도부인과 신덕철 전도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성도수가 30명이 넘을 만큼 성장해갔고, 당시 미 군정청 통역이었던 김태구를 중심으로 한 청년들이 주일학교도 시작됐다. 상월교회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가난도, 나라를 잃은 시대적 암울함도 이겨갔다.
그 즈음, 해방이 찾아왔다. 이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인해, 교회는 여전히 핍박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1948년, 대통령이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며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감격적인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도 이루어냈지만, 시대는 그야말로 외줄타기와 같이 위태로웠다. 급기야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황은 마치 급물살처럼 남북으로 요동쳤다.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정복하고 한달도 못되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땅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 대부분이 북으로 쫒겨갔지만, 군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전라남도 해안 지역은 예외였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인민군 잔류세력과 좌익 세력이 합세하여, ‘빨치산 유격대’를 조직했다. 이들의 주요 이동경로는 지리산에서 전라남도 도서지역이었는데 그 중간에 월출산을 끼고 있는 영암은 바로 이 빨치산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