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광에는 세계 개신교 역사에 기록된 세계적인 순교지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교회 탄압에 항거해 신앙을 지키려다 약 200명 가까운 성도들이 순교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두 개의 교회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 한 교회가 야월교회이고 또 한 교회가 염산교회다.
위대한 순교자의 땅, 전남 영광2 <염산교회 >
고려와 조선의 대표적인 유배지였던 전라남도 영광은 구한 말,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에 힘입어 세계적인 복음의 성지로 변신하고 있었다. 열강들의 계속되는 침탈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던 암울했던 시대, 나라도 돌아보지 않았던 외로운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만이 진정한 왕이자, 부모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먼 길을 기쁨으로 오갔다. 그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가난하지 않았다. 세상은 누릴 수 없는 평안과 은혜와 축복을 가졌고, 가족보다 더 서로를 사랑하는 교회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염산교회의 시작은 1939년 옥실리교회에서 출발한다. 허상(후에 장로)의 기도로 시작된 옥실리 교회 성도들은 해방이 되자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면소재지 옆으로 교회 건물을 옮기고 이름도 새로 지었다. 그렇게 탄생한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염산교회다.
전라남도 남서쪽 작은 항구에 위치한 이 교회에는 일 년 내내 전국에서 오는 성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교회사상 단일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순교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나던 해 봄, 염산교회에는 3대교역자인 김 방호 목사가 부임해온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출신인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된 뒤, 산간벽지와 오지의 교회만을 섬기던 중 염산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뜨겁고 강인한 신앙과 애국정신으로 교인들을 성장시켰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7월 23일에 영광지역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우익인사들과 일부 성도들이 희생당하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희생이 시작된 것은 겨울부터였다. 교회 청년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을 환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처 퇴각하지 못하고 산에 숨어 있던 공산당은 밤마다 내려와 교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 초대 목회자였던 허상장로를 비롯해 김 방호 목사가족 등 모두 77명이 석달 사이에 순교했다. 국군과 UN군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기 삼도(당시 목포성경학교 학생)를 죽창으로 찔러 죽인 것을 시작으로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군은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야월교회 순교는 1950년 가을에, 염산교회 순교는 한겨울에 이루어졌다. 바로 지금 이즈음인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77인의 성도가 순교했다. 한 겨울에 이곳 수문에서 뒤로 손을 묶고 목에 돌을 매단 채 이곳 설도 항 수문위에서 떨어뜨렸다고 전한다.
썰물 때에 사람을 빠뜨리면 그 때는 발이 땅에 닿기도 하고, 걸어서 해안가로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면 장대로 밀어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서서히 밀물이 들어오면 물은 가슴에서 목으로 목에서 얼굴로 차올랐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서서히 온 몸이 얼기 시작하면서 의식을 일어가게 된다. 그런데 목격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그 입에서는 자신을 물에 빠뜨린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와 순교의 영광을 주신 주님을 향한 감사 찬양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교인들이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죽음을 당했던 것은, 공산당이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은 육지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나에겐 돌아갈 천국이 있다는 확고한 천국소망이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 교회의 성도는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순교를 당하면 나도 순교를 당한다, 함께 교회를 위해 일하던 이웃의 성도가 순교를 했으니 나도 순교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했다
차종순 전 호남신대 총장은 이런 끈끈한 공동체의식이 품앗이를 하던 농경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이 신앙공동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국군에 의해 완전해 수복된 1951년 2월 24일 수요일 밤,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서 다시 예배를 드렸다. 이 때 모인 이들은 전 교인의 1/3 남짓이었다. 당시 교회 성도이자 신학생이었던 안종렬 전도사는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교회 뜰 안에 안장했다.
이 설도 수문의 일몰은 장관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서면 환상적인 아름다움 앞에 목이 매인다. 성도라면 아찔한 붉은 석양빛이 바다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일 때 수문 앞에 서기를 권한다. 60여 년 전 순교자들이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서면 저절로 내 안에서 애써 외면했던 질문들이 터져 나온다.
나에겐 예수님이 계신 천국을 향한 소망이 있는가. 나는 교회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는 성도가 순교한 그 자리에서 그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는가. 교회 안의 누군가가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할 때 나도 함께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순교자들이 그들의 마지막 숨을 주님 앞에 드린 이곳에 서면,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글 이 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 선교회 대표
사진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제공 (www.koreanbibleroad.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