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선교사마을
그러나 그로부터 십여 년 후, 순천 왜성에서 서북쪽으로 약 12킬로미터 떨어진 매산동 공동묘지 터 위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마을이 탄생한다. 순천 뿐 아니라 전라남도 남부 해안 지역 선교의 베이스캠프였던 그 곳은 70여명의 선교사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순천 선교사 마을이다. 순천선교 100주년이 되던 2012년에 개관한 순천시 기독교역사박물관은 약 600여 점의 유물을 통해 당시 순천선교부의 활동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젊은 선교사의 순교가 낳은, 전라남도 선교 중심지
1894년 레이놀즈와 드류 선교사가 순천에 처음 복음을 전한이래 전라남도 전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선교사들이 순천을 오가며 복음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04년, 미 남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클레멘트 오웬이 선교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순천선교가 시작됐다.
클레멘트 오웬은 1894년 ‘7인의 선발대’를 처음으로 한국에 파송한 미 남 장로교가 그 이듬해인 1895년 2차로 파송한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28살의 전도유망한 의사였고 함께 파송된 또 한 사람의 선교사는 27살의 젊은 목사 유진 벨이었다.
한국으로 건너 온 두 사람은 함께 목포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896년 무덤터였던 양동지역의 땅을 매입한 유진 벨은 윌리엄 레이놀즈와 함께 양동교회를 개척했다. 진료활동으로 두 사람을 돕던 클레멘트 오웬은 프렌치 병원을 열어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1904년, 광주로 옮겨, 어린 아이들의 장례를 치르던 양림동에 터를 잡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교회 설립에 착수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순천의 교회를 맡길 사람을 찾던 미 남장로교는 오웬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웬은 낮에는 진료를 하고 저녁이면 섬과 마을을 다니며 기도와 예배를 인도했다. 그는 10여개에 이르는 순천 관내 선교지를 한 달에 최소 한 번 이상 방문하는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그는 하루에 2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 교인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5년간 그가 순천에서 선교하는 동안 4개소에 불과했던 예배 처소가 70여개로 늘었고 100명도 안 되었던 세례교인은 1500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결국 과로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부임 5년 만인 1909년에 순교하고 만다.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42세. 당시 그를 구하러 오던 친구 의사 포사이드가 오는 길에 한센병 여인을 구하느라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오웬은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숨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았지만 이후 포사이드는 오웬의 목숨과 맞바꾼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계기가 되었고, 미 남 장로교는 오웬이 목숨 바쳐 일군 순천 지역 교회를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선교본부를 꾸리게 된다.
오웬의 뒤를 이어 순천 선교부를 맡게 된 이는 광주에서 활동하던 존 프레스톤 John Fairman Preston과 로버트 코이트Robert T. Coit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순천 외곽 산기슭에 있던 약 12만평 4만m2약 12만평 규모의 공동묘지 터를 싼 값에 매입하고 본격적인 선교구역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프레스턴은 선교구역 조성자금을 구하기 위해 미국 순회 강연에 나섰다. 조선의 기독교 전파와 오웬의 순교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많은 이들이 후원을 시작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 장로교회에 출석하던 기업가 조지 와츠였다. 조지 왓츠는 선교사들의 사택 7채 건립비용을 비롯해 병원과 학교 건축비, 그리고 매달 선교사 13가정의 생활비까지 막대한 금액을 지원하기로 한다. 그가 매달 지원한 선교사 생활비는 13,000달러로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을 하면 최하 3억 이상 되는 거금이었다.
선교사마을, 상처의 땅 순천의 희망이 되다
이런 기적 같은 후원 속에서 순천 매산동 언덕에는 근대식 상하수도 시설과 전기 등 기반 시설을 갖춘 교회와 학교, 그리고 미국식 벽돌 건물로 지어진 선교사의 숙소까지 갖춘 순천 선교구역이 들어섰다. 건축 기법이나 마을의 구성은 물론 모든 시설 면에서 광주나 목포 등 대도시에서도 전례가 없는 체계적인 근대 도시의 형태를 갖추었다. 외선교사 자녀는 물론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많은 외국인 자녀를 위한 외국인 초등학교도 있었다.
이 때가 1913년 무렵, 이후 존 크레인 선교사의 열정으로 매산 학교가 들어섰고 1916년에는 한국에 잠시 선교사로 왔던 켄터기 거부의 아들 알렉산더 알렉산더의 후원으로 순천알렉산더 병원이 문을 열었다. 1925년에 건립된 조지 와츠 기념관에서는 프레스턴 선교사의 성경학교가 열렸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매산리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매산 학교의 전신인 매산관이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 건물은 1930년에 설립된 순천의 대표적인 근대 석조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 복음과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학교로 재학생들의 자부심이 높았고,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조치를 당하기도 했으나 매산 중학교로 오늘날까지 그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매산 고등학교가 자리한 그 곳에는 무료 진료소로 순천은 물론 인근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알렉산더 병원이 있었다. 1991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알렉산더 병원은 순천과 인근의 해안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심장부였다.
매산고등학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에 전라남도문화재로 지정된 코잇가옥이 있다. 1913년에 건립된 석조 건물로 로버트 코이트 Robert T Coit, 한국명 고라복 선교사가 살던 집이다.
선교사 마을의 탄생과 함께 순천의 선교활동은 날개를 단 듯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순천에는 가곡리 교회 평중리 교회 그리고, 사룡리 교회(1920)등 약 100여개의 교회가 탄생했고 출석 성도의 수는 6천 명을 넘었다. 뿐만 아니라 순천선교부는 여수와 고흥, 구례와 곡성 등 산간지역과 섬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 사이 최첨단 시설을 갖춘 근대식 도시였던 선교사마을은 순천 사람들의 자랑이 되었고 그곳을 구경하러 들락거리던 지역 주민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또한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학교와 병원 덕분에 순천 지역 사람들의 삶의 환경은 인근의 큰 도시조차 부러워하는 수준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다. 지금도 순천에는 바닷가 마을에서 흔히 눈에 띄는 토속 우상들 대신 교회들이 즐비하다. 순천은 지금도 여수에 이어 전라남도에서 복음화 비율이 높은 도시다. 100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의 전진기지를 세운 70여 명의 선교사들과 그들을 통해 세워진 초대 성도들이 때론 목숨을, 때론 평생을 바쳐 헌신한 결과다.
순천 선교 100년의 향기를 품은 집, 고 안기창 목사 사택 앞에서
매산리 언덕 가장 안쪽, 순천기독교역사 박물관과 담장을 나란히 하고 있는 아담한 단층집이 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정성껏 가꾼 나무와 봄부터 여름까지 갖가지 꽃들이 울긋불긋 그림 같은 자태를 뽐내는 정원 위에 오래된 벽돌집 한 채가 단아하게 앉아 있다. 이곳은 순천 선교 역사의 산 증인이자 순천이 배출한 초대 목사 중 한 사람인 고 안 기창 목사의 집이다.
안기창 목사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이기풍 목사였고, 그를 선교사의 길로 이끈 이는 유진벨의 외손이자 윌리엄 린튼의 아들이었던 휴 린튼이었다. 군산에서 태어나 미국 콜럼비아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휴 린튼은 1953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가 되어 돌아왔다. 1954년 순천선교부에 파견된 그는 특유의 건축 솜씨를 발휘해 교회는 물론 아내가 치료하던 환자들의 집까지 지어주곤 했다. 세 자녀를 결핵을 잃은 뒤에는 결핵전문병원을 열어 결핵 퇴치에 나섰다. 그는 평소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녀 ‘순천의 검정고무신’으로 불릴 만큼 소탈했다.
그는 순천 토박이 젊은 안기창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순수함을 첫 눈에 알아보고 동역자로 이끌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24년간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니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전통적으로, 거친 바다를 상대로 살아가야 하는 해안 지방은 온갖 미신의 온상이자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서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바닷가 마을로 선교여행을 다녀야 하는 린튼 선교사에게 말수는 적고 행동은 빠르며 두뇌가 명석했던 안기창은 더 없이 믿음직한 동역자였다.
두 사람이 집중했던 핵심 사역은 처치 플랜팅Church Planting이었다. 1970년에 설립한 등대선교회를 중심으로 ‘10리마다 1교회 개척’을 원칙으로 하는 처치 플랜팅Church Planting으로 한반도 복음화의 목표를 세웠다. 1974년에는 전국을 발로 다니며 1.181곳의 교회 후보지를 발굴, 그 결과를 미 남장로교 본부에 보고를 하는 한편, 1천 교회 개척의 목표를 세우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2백 여개의 교회를 개척했을 즈음 휴린튼 선교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안기창은 수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50년간 전라남도 복음 전파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자신이 만났던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활동의 생생한 역사를 두 권의 저서로 남겼다.
2년 전 안기창 목사는 95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이제 정원에 핀 어떤 꽃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노 목사 부부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살아온 평생이 순천 선교의 역사인, 경이로운 믿음의 선배인 안기창 목사님 댁 앞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미며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라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게 된다.
이소윤/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대표
사진제공/코리아바이블로드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