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반도 북쪽에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은 밤나무가 잘 자라는 기후와 토양을 갖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도 밤나무가 무성했다. 그런데 조선 숙종 시대인 1607년 어느 날 하루밤 사이에 밤나무가 모두 사라지는 이변이 벌어진다. 사연인즉, 그 때까지 이 지역 주민들은 밤나무가 많다는 이유로 과중한 <밤세>를 내야만 했다. 흉년이 들어도 탐관오리들은 막무가내였고 할 수 없이 율촌면 사람들은 다른 마을에서 몇 배나 비싼 밤을 사다 바쳐야만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순천부사 이봉징은 율촌면 주민들과 함께 야밤에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렸고 이후 율촌면 사람들은 더 이상 밤세를 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봉징에게는 자신의 관료 인생을 건 위험천만한 결행이었다. 이에 율촌면 백성들은 이봉징의 ‘뜨거운 애민’에 감동하여 밤나무가 있던 바닷가 바위에 그 은덕을 새겨 넣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봉징의 마애비가 있었다는 그 바닷가에서 또 다른 ‘애민’의 역사가 시작됐다. 1928년, 광주 제중병원장인 로버트 윌슨 박사를 비롯한 벽안의 선교사들이 율촌면 바닷가 끝 신풍리에 근사한 2층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건물은 미국의 교회와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부와 헌금으로 이전 신축한 나병원이었다.
나병원의 탄생은 이 곳 여수 순천 지역 오웬 선교사의 순교로 시작됐다. 1909년 봄, 과로로 쓰러진 오웬 선교사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포사이드 선교사는 말을 타고 광주에서 순천을 향해 달렸다. 그 길에 우연히 거리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다가가 보니 한센병 환자였다. 포사이드는 망설임 끝에 여인을 말에 태우고 걷기 시작했다. 겨우 순천에 도착했을 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동료 선교사의 목숨과 맞바꾼 한센병 여인을 데리고 광주로 돌아온 포사이드는 광주 제중병원 원장 로버트 윌슨에게 여인의 치료를 부탁한다. 하지만 전염성이 강한 나병 환자를 일반 병동에 입원 시킬 수가 없었던 윌슨은, 인근의 벽돌 굽는 가마터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오웬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했던 포사이드는 한센병 여인에게 오웬이 쓰던 침대와 이불을 가져다주며 간호를 하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가 한 곳도 없는 여인을 직접 부축하기도 하고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기도 하며 정성껏 간호해 주변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한센병 여인은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죽음을 통해 한센병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알게 된 로버트 윌슨 광주제중병원장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나병원을 열었다. 그 때가 1909년, 당시 한센병 환자 6명으로 출발한 병원은 20년 동안 환자가 500명이 넘을 만큼 커졌다. ‘세상의 멸시를 받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한센병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불치병이 아닌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구름 떼처럼 광주나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광주 시민과 일본 정부는 대도시에 전염성이 강한 한센병 환자들이 몰리는 것을 꺼려해 강제이주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1928년, 로버트 윌슨은 나병 환자 600여 명을 이끌고 이곳 여수 율촌면 바닷가로 오게 되었다.
율촌면에 정착한 나병원 경영진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그들이 살게 될 병원의 이름을 공모했다. 그 공모 결과 선택된 이름이 ‘사랑으로 돌보는 곳’이라는 뜻의 애양원이다. 그리고 병원 안에 있었던 교회도 동네의 이름을 따서 신평리 교회로 부르다가 나중에 성산교회로 바꾸었다.